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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마리 퀴리 최초의 여성 노벨 수상자

by ddoo it 2024. 3. 16.

마리 퀴리 최초의 여성 노벨 수상자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Marie SKłodowska-Curie,)는 1867년 11월 7일 출생하여 1934년 7월 4일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녀는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입니다. 본명은 마리아 살로메와 스크워도프스카(폴란드어: Maria Salome SKłodowska)이다.

방사능 분야의 선구자로, 노벨상 수상자입니다.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라이너스 폴링하고 더불어 노벨상 2관왕에 등극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위인들을 모시는 국립묘지 팡테옹에게 안장되었습니다.

마리 퀴리 최초의 유년기

마리 퀴리는 1867년 11월 7일, 바르샤바에서 가난한 교육자의 1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브로니스와 바는 중학교 교사,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스크워프도프스키(Włdaysław SKłodowski)는 바르샤바 교육청 장학사였습니다. 그녀의 형제로는 오빠 유제프(Józef,)와 조피아(Zofia,), 브로니스와바(Bronisława,), 헬레나(Helena) 언니 세명이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나이 10세 때 폐결핵을 앓던 어머니와 잃었고, 장학사로 일하던 아버지가 직장을 잃기도 하였으며, 큰 언니 조피아가 장티푸스로 요절하기도 하며 어린하이에 가족들을 잃는 혼란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청소년기 시절도 힘들게 보내었습니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폴란드의 전통인 폴란드어, 역사를 공부하는 것조차 억압받았습니다. 그녀의 둘째 딸인 이브 퀴리가 쓴 전기가 1990년대 중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인용되었는데, 이야기에 따르면 마리퀴리는 여학교에서 폴란드어와 역사를 공부하다가 장학사가 오면 실과 수업을 받는 것처럼 숨겨야 했습니다. 러시아 장학사들은 폴란드 학생들이 러시아어 주기도문을 외우도록 함으로써 많은 폴란드 사람들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민족말살에 악용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너희를 다스리는 분은 누구냐?"라고 물어서 식민지배에 순응하도록 하는 등 마리 퀴리의 어린시절은 도망과 순응의 연속이었습니다.

마리 퀴리의 유학 생활

그녀는 성 차별이 없는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싶어했으나 가난하여 학비가 없었기 때문에, 3년간 시골의 부유한 농가의 가정교사로 직접 고용되어 사용자의 딸과 아들을 가르치며 과외 교사 생활을 하게됩니다. 이후에는 러시아의 식민지배를 받는 폴란드 민족문제를 고민하던 폴란드인들로 부터 허락을 받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녀는 대학을 가고 싶었으나 17세 무렵부터 과외 교사 등을 할 때, 폴란드와 독일에서는 여자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 갈길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후 다행히도 그녀의 아버지가 소년감화원 사감으로 재취업하게 돠며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마리는 둘째 언니 브로니스와바와 형부 카지미에시 드우스키(Kazimierz Dłuski) 부부가 의사로 일하고 있던 프랑스 파리에서 언니 부부의 돌봄을 받으며 유학을 시작하게 됩니다.

언니 브로니스와바와 마리가 교육을 강조함으로써 폴란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는 계몽주의자였다면, 형부 카지미에시는 자본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없이는 민중 해방이 없다는 냉철한 현실 이해를 주장한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녀는 1891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J. H. 푸앵카레, G. 리프만 등의 강의를 수강합니다.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며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여 물리학과 수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녀의 학사학위취득 시험 성적은 수학은 1등, 물리학은 2등으로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마리 퀴리가 학문을 매우 꾸준하게 했음을 알 수 있는 성적입니다.

마리 퀴리의 업적

그녀는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물리학상하고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입니다. 노벨상을 2회 수상한 기록은 라이너스 폴링하고 함께 최다 기록입니다.

그녀는 박사학위 논문주제를 찾고 있었는데, 당시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염에서 일어나는 베크렐선 현상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연계에 베크렐선 현상을 보이는 물질이 우라늄 외에도 더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그 물질들을 찾아 연구하기로 결심합니다. 마리는 '피치블렌드(역청우라늄광)'라는 광물이 순수한 우라늄보다 강한 방사능을 배출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고, 이러한 광물을 효과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에 관해 피치블렌드의 성분을 분리하는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퀴리 부부는 함께 공동연구를 하기로 하고, 지루하고 긴 실험을 반복하며 피치블렌드의 성분을 분리하여 1898년 마침내 베크렐이 연구했던 우라늄보다 감광작용이 4배나 강한 새로운 물질을 찾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미지의 물질이 두 가지 원소를 혼합한 혼합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그중 하나를 분리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새로운 원소는 우라늄염보다 400배 정도 감광작용이 강한 원소였습니다.

퀴리 부부는 새로운 원소의 이름을 마리의 조국 폴란드를 기리는 의미에서 ‘폴로늄’이라고 명명합니다. 마리는 우라늄이나 폴로늄처럼 자연계에서 감광작용과 전리작용 및 형광작용을 나타내는 물질들에 대해 처음으로 방사능(또는 방사성물질)이라고 불렀고, 이들 물질에서 나오는 빛을 방사선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또 다른 새로운 원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감광작용 능력이 우라늄보다 무려 250만 배나 강한 원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원소는 강력한 빛을 ‘방사’한다는 뜻으로 원소의 이름이 ‘라듐’이라고 지어졌습니다.

퀴리 부부가 라듐의 성질을 자세히 조사한 결과, 그 방사능은 어떤 화학작용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라듐의 양에 비례해 방출되는 방사선이 강해지고, 감광작용과 전리작용도 강해진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방사선 방출과정에서 상당한 열이 나온다는 점도 알아내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과학계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화학반응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마리는 이러한 현상이 물질의 기본적인 구성단위인 분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그보다 더 작은 단위인 원자 수준에서 연구해야 하는 현상임을 밝혀내게 됨으로써 과학 연구의 새로운 발전방향을 제시합니다.

그 훌륭한 라듐 연구로 1903년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1907년에는 라듐 원자량의 정밀한 측정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후 1910년에는 금속 라듐을 분리하여, 1911년에는 라듐 및 폴로늄의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그 화합물 연구로 마리 퀴리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게 됩니다. 그녀의 위대한 업적을 기려 방사능 단위에 퀴리라는 이름이, 화학 원소 퀴륨에 이름이 사용되데 됩니다. 마리 퀴리의 딸 부부인 이렌 졸리오퀴리와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로 훌룡한 가문의 길을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폴란드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여성이라는 성차별적 문제로 결국 화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등극하지는 못한 슬픔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