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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최초의 달 착륙자 날 알엔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

by ddoo it 2024. 3. 16.

최초의 달 착륙자 날 알엔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

날 오던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 1930년 8월 5일 ~ 2012년 8월 25일)은 미국의 우주비행사, 시험 비행사, 대학 교수, 해군 비행사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으며 그는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1971년 NASA에서 사임 한 후, 암스트롱은 1979년까지 신시내티 대학교 항공 우주 공학과에서 가르쳤으며, 그는 아폴로 13호 사고 조사에서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 사건을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여러 기업의 대변인으로 활동했으며 1979년 1월부터 크라이슬러 자동차 브랜드 광고에도 출연했습니다.

닐 암스트롱의 생애

닐 암스트롱은 1930년 8월 5일 미국 오하이오주 와 파 코에 타라는 조용하고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어린아이인 닐 암스트롱은 유난히 비행기와 전투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꿈은 청년 시절에도 이어져 1948년 퍼듀대학교의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한 후 곧바로 해군 항공대에 지원을 위해서 해군 비행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닐 암스트롱이 우주비행사가 되기까지

그는 비행학교에 진학하여 비행 수업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전투비행사 훈련 중인 1950년 6·25전쟁 때 제트 조종사로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어 휴학을 하게 됩니다. 암스트롱은 이 전쟁에서 78차례 전투기를 출격해 활약을 보였습니다. 그는 수많은 한국전쟁에 참여하며 많은 임무를 수행하였고, 임무를 수행하며 그가 가진 기술과 연구를 끊임없이 연마했습니다. 1953년에 정전협정 뒤, 조국으로 복귀한 암스트롱은 1955년에 비행학교에 졸업한 뒤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고속 비행 기지에서 900회 이상 시험 비행사로 활약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화려한 경력과 경험에 주목한 미국은 미항공우주국(NASA)을 창설한 4년 뒤인 1962년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제2기 항공우주 사로 스카우트되어 우주비행 적응 훈련에 돌입합니다 닐 암스트롱은 4년간의 우주비행 적응 훈련을 마치고 1966년 3월 제미니 8호의 선장으로 D.R.스콧과 함께 첫 우주비행을 하며 어제나 위성과 최초의 도킹에 성공합니다.

이어 3년 뒤 아폴로 11호 우주선의 선장이 되어 1969년 7월 16일, 버즈 올드린과 마이클 콜린스 비행사와 함께 플로리다주의 케네디 우주 기지를 출발합니다. 이후 4일 후에 달 주위를 도는 궤도 위에서 모선에 남은 마이클 콜린스와 헤어져서, 올드린과 함께 달 착륙선으로 '고요한 바다'에 착륙하였고 여기서 암스트롱은 휴스턴의 나사 본부 교신에 성공하게 됩니다. 교신에 성공하며 그는 이곳 '고요한 바다'에서 굉장히 유명한 말을 남긴다. "이 첫걸음은 한 인간에게 있어서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게 있어서 커다란 첫 도약입니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그는 '고유한 바다'에서 인류의 커다란 한 걸음을 버즈 올드린과 함께합니다. 그는 달 표면을 2시간 반 동안 탐사하게 되었고, 탐사 시간 동안 달 표면에 모래와 암석을 모으는 한편 지진계 등을 설치해 놓은 후 5일 뒤 무사히 지구로 돌아옵니다. 위대한 지구의 업적을 남긴 그의 나이는 당시 39세였습니다.

닐 암스트롱의 첫 달착륙 이후의 업적

닐 암스트롱은 1975년 NASA를 은퇴한 후 신시내티 대학교에서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로 지내다가 1979년에 퇴직합니다. 닐 암스트롱은 NASA의 사고조사위원으로도 활약했습니다. 첫 번째는 사고는 1970년의 아폴로 13호 사고였고, 두 번째 사고는 1986년에는 챌린저 우주왕복선의 폭발 사고를 조사하는 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위원회를 이끌었습니다.

닐 암스트롱은 1975년에 NASA를 퇴사하며 많은 대기업들로부터의 금전적, 명상적 유혹들도 있었지만 그는 계속 거절하다가 평직 성향의 비 임원 영입을 수락하여 크라이슬러를 통해 1979년 1월부터 선전에 출연을 시작했습니다. 그 외 전미 은행협회 등 주로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CM에도 출현하며 꾸준히 다양한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 외에 Thiokol(ATK Launch Systems Group) 등의 기업들의 경영에도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최초의 달착륙 자(1969년 39세 시절) 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이로 인한 심적 스트레스와 부담감으로 결국 심장질환을 앓게 된 그는 2002년을 마지막으로 기업 경영에서도 은퇴하게 됩니다.

날 암스트롱의 사망

시간이 지나 닐 암스트롱의 건강은 점점 악화하여 관상동맥 협착 증세로 인해서 심혈관계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합병증이 발생하여 결국 2012년 8월 25일에 82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사망 당시 미국에서는 닐 암스트롱의 장례식을 국가의 장례 즉 국장으로 치러야 한다고 목소리 들이 들렸습니다. 특히 닐 암스트롱의 고향인 오하이오주를 중심으로 암스트롱의 국장 진행해야 한다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요청하자는 목소리를 크게 내었습니다. 그 결과 오하이오주의 빌 존슨 하원의원은 AP통신 등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께 정식으로 요청할 예정"이라고 입장을 밝히게 되며 전 미국 시민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미국에서 마지막 국장이 치러진 것은 지난 2006년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의 장례식 때가 마지막입니다. 전직 대통령을 제외하고 국장이 치러진 경우는 1964년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군의 장례식이 마지막이었습니다. 특히 국장이 진행되려면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한데,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하는 업적을 남겨 미국의 국가적 위엄을 높였다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았고, 그만큼 국장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 국장 지지자들의 주장이 많은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하지만 닐 암스트롱은 죽기 전에 많은 국제적 관심을 받으며 젊은 시절은 보내서 그런지, 자신의 장례식을 너무 국장 형식으로 호화롭게 치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화장한 뒤 대서양 바다에 뿌리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유해는 본토에서 화장된 뒤 미국 해군에 의해서 대서양에 뿌려지며 그의 장례가 치러졌습니다.